영식재(永式齋)는 광주 광역시 서구 매월동 화개산(華盖山,속칭 개금산) 남록(南麓)에 위치해 있다. 조선 영조(英祖) 때(1750 년 경) 전북 남원(南原)으로부터 이곳 광주(光州) 세하동 동하(洞荷) 마을로 이거(移居)한 흥성장씨(興城張氏) 낙남(落南) 선조(先祖)인 효우당(孝友堂) 창우공(昌羽公, 1704년-1774) 의 제향(祭享)을 모시기 위하여 후손(後孫)들이 축조한 건물이다. 정면 4 칸 측면 2 칸인 팔작지붕으로 된 이 건물은 1929 년(己巳年)에 공정이 완료 되었다. 효우당(孝友堂) 공(公)은 성품(性品)이 총명(聰明)하고 양친(兩親)을 효도(孝道)로 극진히 보살펴 드리며 종친(宗親)과는 우애(友愛)가 돈독하였다. 어버이께서 병환에 드시자 정성을 다하였으나 마침내 상(喪)을 당하니 슬픔이 너무 커서 예절(禮節)을 갖추지 못 할 정도였으나 장례(葬禮) 절차는 철저히 의식(儀式)에 좆아 하였다. 장례(葬禮) 후 3 년간 시묘(侍墓)하였는데 하루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어 그 자리에는 풀도 자라지 못하였고, 신묘(神妙)하고 기이(奇異)하게 효성(孝誠)에 감동(感動)한 호랑이가 여막(廬幕) 주위를 호위(護衛)하였으니 실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일이 이루어졌다. 이런 까닭으로 주위에서는 칭송(稱頌)이 자자하고 지방 사림(士林)이 다투어 칭찬(稱讚)하여 공(公)의 훌륭한 행적(行蹟)이 묻혀지지 아니하고 향론(鄕論)이 계속있었으니 이 사실이 광산읍지(光山邑誌) 및 삼강록(三綱錄)에 소상이 기록되어 왔다. 전 고을이 흠모(欽慕)하는 이 일을 다만 한 집안의 본보기로만 할 것이 아니라 대대로 오래 계승(繼承)하여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니 의친왕(懿親王) 전하(殿下)께서 이 같은 행적(行蹟)을 살펴 감탄(感歎)하시고 특별히 이 사실을 권장(勸奬)하시며 재각(齋閣) 편액(扁額)을 <영식(永式)>이라 제자(題字)하시고 즉석에서 휘호(揮毫)하시었으니 비로소 마음이 바로 서야 참마음도 거기에 있고 세상(世上) 일은 반드시 이것에 기인(起因)하여 종결 된다는 것도 알았다. 더불어 말 한다면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선생께서 재각(齋閣) 상량문(上樑文)을 지으시고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선생, 안동후인(安東后人) 김서규(金瑞圭) 지사(知事)께서 기문(記文) 쓰시어 선조(先祖) 추모(追慕)함을 크게 칭송하였으니 더더욱 후손(後孫)들에게 부지런히 힘쓰라는 마음까지 밝혀 주셨으니 어찌 거듭 당부(當付)의 말씀이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지금도 <영식(永式)> 의 편액이 처마 높이 걸려 있고, 대청(大廳) 마루높이 상량문(上樑文) 기문(記文) 등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재각 앞에 <민재공(敏齋公) 퇴장(退葬) 추모비(追慕碑)>가 있다 이 비는 조선(朝鮮) 헌종(憲宗) 때에 어떤 家門에서 先山을 무단 침범해 투장하려는 것을 이에 격분한 공(公)의 증손(曾孫) 민재공(敏齋公) 봉익(鳳翼)이 단독으로 범장(犯葬)을 물리치고 선영(先塋)을 지킨 사실을 추모하면서 1950년(庚寅年)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