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광송(光松) 도로를 따라 송정(松汀)으로 가면 서창(西倉) 입구에서 남평 방면으로 접어들어 약 2Km를 가면 만귀정(晩歸亭)이란 표석이 서 있다. 만귀정은 커다란 연못에 수중 정자 3개가 한 줄로 늘어서 장관을 자랑한다. 또한 주변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해송, 벽오동, 왕벚나무, 해송이 우거져 주변과 운치를 이루고 있다. 4천 2백 제곱미터 쯤 되는 큰 연못 안에 줄을 지어 3개의 섬이 있는데 섬마다 亭子가 하나씩 세워져 있다. 만귀정(晩歸亭), 습향각(襲香閣), 묵암정사(墨菴精舍)로 배치되고 이들 섬과 연못 주위에 각종 나무가 絶景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마을 앞 도로확장으로 만귀정(晩歸亭)과 섬의 일부가 메워져 지금은 1개의 섬만이 남아 있다. 만귀정은 1750년 경 전북 남원(南原)에 살던 효우당(孝友堂) 장창우(張昌羽)께서 광주 서구 동하(洞荷)에 이거한 후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초당이다. 1934년 중건을 시작 광복이 되던 45년에 현재의 정면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완성을 보았다. 정자의 명칭에 대한 유래로는 효우당(孝友堂)이 그의 늙은 인생을 자연과 더불어 보내겠다는 영귀(詠歸)의 뜻으로 해석된다. 문화재 자료 5호로 지정된 만귀정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당시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서로의 흥취를 돋은 곳으로 유명하다. 만귀정 계단을 내려와 연못의 다리를 건너면 습향각(襲香閣)이 있는데 이곳은 1940년에 효우당 7세손 묵암(墨菴) 장안섭(張安燮)이 지었는데 사방 1칸의 팔작지붕으로 주위의 연꽃 향기가 엄습하여 온다는 뜻의 이름이다. 습향각을 지나면 묵암정사(墨菴精舍)인데 이 곳은 안섭공(安燮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친척, 친지들이 성금을 모아 노년의 휴식처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준 것이다. 만귀정에 걸려 있는 40여편의 詩懸板 중 정자의 주인공 효우당의 시는 8경(景)을 읊은 것으로 유명하다. 瑞石明月 (무등산에는 밝은 달이 떠 있고) 龍江漁火 (용강에는 어부들의 불빛이 있네) 馬山淸風 (마산에는 맑은 바람 산들거리며) 樂浦農船 (낙포에는 농사를 위한 배가 오간다) 漁燈暮雲 (어부들의 등불에 저녁 구름 피어나고) 松汀夜雪 (송정에는 흰눈이 밤을 밝히며) 錦城落照 (금성에는 아름다운 저녁 노을) 野外長江 (들 밖에는 길고 긴 강물이 흐르네) 만귀정의 아름다운 경치를 세인(世人)들은 찬미하고 있다. 봄이면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연못에 흰 꽃잎이 휘날리고, 여름이면 녹음이 짙은 그늘과 물위에 퍼지는 은은한 창포와 연꽃 향기, 가을에는 극락(極樂) 강변에 펼쳐지는 넓은 들판에 누렇게 익은 벼와 정자 주변의 상사화가 호반을 뒤덮고 겨울에는 노송에 걸친 설화가 장관을 이루어 지상의 선경이로다.
만귀정은 광주 서구 세하동 동하부락 입구에 위치해 있다. 수중 정자(亭子)로 만귀정, 습향각, 묵암정사 등이 일열로 배치되어 있는 매우 특이한 정자(亭子)이다. 이 정자(亭子)는 흥성장씨 낙남(落南) 선조인 효우당 장창우(호가 만귀)가 후학을 가르친 옛터에 후손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리 위해 이 정자(亭子)를 지었다. 만귀정은 수 백년 세월이 흐름에 따라 건물 자체가 퇴락되어 없어지고, 대신 그 흔적을 알수 있는 기초만 남아 있었다. 이를 애석하게 여긴 그의 후손들이 선조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일부러 이 정자(亭子)를 지어 옛날의 모습을 복구한 것이다. 정면과 측면 모두 2 간, 팔작지붕으로 된 이 건물은 1934년 (갑술년)에 중건되었으나 이를 마치지 못하고 지연해 오다가 1945년(을유년)에 장안섭, 장대섭, 장창섭 등의 주도에 의해 그 준역이 완료 되었다. 습향각(襲香閣)은 묵암 장안섭이 1940년(경진년)에 지은 사방 1칸의 팔작지붕으로 주위의 연꽃 향기가 엄습하여 온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습향각이라 하였다. 묵암정사(黙闇精舍)는 묵암 장안섭이 송정읍장으로 재직시 남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친척 및 친지들이 성금을 모아 지은 그의 휴식처이다. 1940년 (경진년) 건립되었으며 그 구조는 습향각과 비슷하다. 연못 쪽으로는 난간이 둘러있는 만귀정을 중심으로 한 습향각, 묵암정사는 모두 도리 초석, 도리 지붕으로 되어 있고, 그 곳 사방의 주위가 송죽 화초로 둘러 있어 경관은 매우 아름답다. 보존 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며 옛날 이 정자(亭子)의 주인 장창우가 자신의 소회를 읊은 원움과 정자(亭子)의 경관을 8 개항으로 분류한 8경문이 전래되고 있고 이 운자를 차운한 후손 및 유림들의 시구가 많다.
정자가 없어진 옛터에 다시 정자를 세워 그 이름을 만귀라 한 것은 옛날의 그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함이요, 옛날의 그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려 한 것은 또 그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 정자는 원래 장씨의 선조 효우당공이 대방(현 남원)으로부터 광산으로 이거하면서 지은 건물이다. 공의 성품은 본래 효우하여 부모 상사에 3 년간의 여묘 살이를 한 지극한 효자였다. 이러한 효성에 감복한 산속의 괴이한 짐승들이 일부러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의 주위를 호위해주는 감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참으로 인륜의 명분을 일으키는 도덕의 가르침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공이, 뒤늦게 조그마한 정자를 그가 살고 있는 동하 마을 앞에 세워 그 이름을 만귀라 하였다. 그 이름을 ‘만귀’라 한 것은 늙은 만년에 이곳에 노닐며 한가히 풍류를 즐긴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그러나 수 백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이 정자가 이미 훼손되어 그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선조의 유업을 잊지 않은 추모의 정은 간절하나 이러한 충정을 나타낼 적당한 흔적을 찾지 못 했다. 금년 가을에 공의 후손들이 이 문제에 대해 많은 토론을 거듭한 끝에 옛날 구지에 다시 정자를 세워 선조의 유업을 복구키로 하였다. 선조의 옛터를 다시 다듬어 정자를 세워 낙성하던 날, 공의 7 세손 대섭, 안섭, 흥찬, 창섭 등이 나에게 이 정자의 중건 사실을 기록할 기문을 촉탁하였다. 내 또한 본래의 말을 떠나 한가지 장씨를 위해 할 말이 있다. 옛터에 정자를 지어 옛날의 그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은 참으로 선조를 잊지 않은 하나의 불망지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조를 잊지 않은 불망의 실지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학문을 갈고 닦아 높은 업적을 세워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음에 있다. 오직 제군들의 힘찬 근면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갑술 (1934년) 칠월에 장흥인 고광선 씀
이해 을유 칠석날에 우리나라를 침략한 섬나라 일본은 천하의 노여움에 항복하여 본국으로 쫒겨 달아났다. 내 다소 한가한 틈이 있는 이 때를 이용하여 미처 완공하지 못한 선대의 정자(亭子)를 다시 보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홀로 생각하여 보건데, 1934년 갑술년에 시작한 이 정자(亭子)의 중건이 지금까지 완료되지 못하였더라도 그렇게 오랜 세월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정자(亭子)를 완공하지 못한 원인이 이 공사를 착수할 당시의 잘못된 게획에 의해 빚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한 회한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당초 습한 것이 마르고, 빽빽하던 것이 벌어지고, 긴 것이 짧아지고, 평평한 것이 기울러지는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이로 인하여 이 정자(亭子)에 오른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비록 당시의 국난으로 인하여 이 일을 마치지 못하였으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안정되어 한가한 여유가 생겼다. 나의 오랜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대목장(大木匠) 김이동이 그의 보좌격인 조정석 장한섭에 명하여 이 일을 착수하였다. 이것은 좌로 저것은 우로 이것은 도끼로 저것은 톱으로 하는 등의 역사를 진행하여 모자란 목재는 부득이 새로운 것으로 보충하였다. 며칠 간의 빠른 시일에도 모든 일을 마치고 낙성하던 날, 학덕이 높은 지방의 유림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술을 권하였다. 지난날 평평하지 못한 것이 평평하게 되고 지난날 곧지 못한 것이 다시 곧게 되었으며 지난날 편안하지 못한 것이 다시 편안하게 되었네. 고 노래하며 즐거워 하였고 내 또한 이를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이해 9월 말일에 마련한 손자 안섭 삼가 씀
이리저리 거니는 소요(逍遙)의 마음으로 자연을 읊으며 돌아 오니 선조(先祖)의 만년 절개가 이 아니 거룩하며, 조상(祖上)의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오늘의 정자(亭子)(亭子)를 중건하니 후손들의 성심 또한 아름답기 그지 없다. 선조의 옛 터를 다시 찾아 이 정자(亭子)를 중창함은 그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홀로 생각하건데 효우당 장공은 흥성의 망족(望族)이요 돈암(遯菴)의 유손이다. 대방(남원) 땅으로부터 광주로 집을 옮겼으니 일정한 정굴이 없는 적의(適宜)한 땅을 찾아 다니는 교룡(蛟龍)과 흡사하고, 부모의 초상을 당하여 무덤 옆에서 여막(廬幕)을 치고 시묘(侍墓)살이를 하니 이에 감화한 짐승들이 그 주변을 호위하였다. 동하 마을에 정자(亭子)를 지어 팔경(八景)의 원운(原韻)을 남겼고 부모의 가업(家業)을 이어받아 칠세의 휘모를 빛내었다. 어느 산 어느 언덕에 그가 노닐던 장구의 흔적이 남아있고 시(詩)를 읊고 예(禮)를 배우는 현가(絃歌)의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오랜 성상(星霜)이 지나감에 따라 이 정자(亭子)의 마룻대가 저절로 부서져 없어자니 선조(先祖)의 유업을 추모한 손자들 차마 이 정자(亭子)의 황폐를 그대로 간과할 수가 없었다. 여러 자손(子孫)들이 이 정자(亭子)의 중건을 원하였고 길흉(吉凶)을 점치는 복서가(卜筮家)들도 모두 중흥(中興)의 길조(吉兆)라 평하였다. 옛날의 기초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구태여 장소를 물색할 필요가 없고 모든 경비를 여러 사람이 부담해 함께 힘을 합치니 그의 규모가 오히려 구제(舊制)보다 더 나았다. 여러 목공(木工) 장인(匠人)들이 맡은 바 일에 충실하여 공수(중국 노라나의 이름난 목공)와 이루(중국 고대의 이름난 목공)에 못지않는 고도의 기술을 발휘하고 기둥 서까래 등은 모든 목재는 그 나무는 용도에 따라 조례(중국 산 이름, 양질의 목재가 생산됨) 신보(중국 산 이름, 양질의 목재가 생산됨) 등지의 나무와 견줄 수 있는 최고의 송백(松栢)을 사용하였다. 톱으로 썰고 칼로 깍아 며칠 안 되는 짧은 시일에 공정(工程)을 완료하였으니 화려한 이 정자(亭子)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 언제나 비오기 전에 지붕을 동여매는 예방 조치를 취했도다. 꽃나무 아래 단란히 모여 종족(宗族)의 친목을 두터이 하고, 용마루 처마를 위로 덮어 대장(大壯)의 기상을 이루었도다. 솔, 대가 대부분이 자라나니 장차 새 처마에 아름다운 경치가 나타날 것이요, 지초와 단 샘이 뿌리 근원이 있으니 능히 고가의 법통을 이루었다. 겨우 완전하고 아름다운 적의(適宜)한 시설을 하였기 때문에 지나치게 호사(豪奢)함도 아니요, 또 그렇게 누추함도 아니 중간 정도의 위치이고 이처럼 번성하고 이처럼 발전한 것은 실로 선조(先祖)님들이 쌓은 음덕(蔭德)의 그늘이기 때문이다. 아래에 왕골 자리를 펴고 위에 대밭을 드리워 군자(君子)의 잠자리를 편안케 하고, 서쪽에 동산을 만들고 동쪽에 계단을 쌓으니 엄숙한 옛 주인이 이 곳에 오르내리는 듯한 느낌이 앞섰도다. 문밖에 남아있는 수레바퀴 자국은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아온 어진 친구들의 차량(車輛)이 있었기 때문이요 벽 속에 감춰있는 여러 책들은 이미 예전 사람들이 모두 읽고 배운 남은 유물(遺物)이다. 좋은 기억에서도 더욱 기특한 장소를 골라 맑은 샘물과 흰 돌을 그의 친구로 사귀었고, 선조의 음덕(蔭德)을 받아 날로 새로워지면서 자손으로서 해야 될 추모의 정을 다하였다. 이에 비속(卑俗)한 이 사람의 짧은 아랑 노래를 연이어 불러 들보를 올리는 작업을 돕고자 한다. 무거운 상량(上樑)이 동쪽으로 당겨지니 화개봉 꼭대기에 서기(瑞氣)가 불어 있네 긴 밤이 침침하니 꿈애기 그만 하소 신명(神明)한 영대(靈臺) 속에 성옹이 앉아 있네 무거운 상량(上樑)이 서쪽으로 당겨지니 금성(錦城)이 높이 솟아 그 길이 높고 낮네 타인의 고운 옷 뭣하러 원할손가 훌륭한 명예(名譽) 얻어 몽 닦고 치가(治家)하리 무거운 상량(上樑)이 남쪽으로 당겨지니 극락강 흐른 물에 화기(和氣)가 뭉쳐있네 풍욕(風浴) 후 돌아와서 한가히 시(詩) 읊으니 춘삼월(春三月) 좋은 시절 즐거이 놀아보세 무거운 상량(上樑)이 북쪽으로 당겨지니 어등산 높이 솟아 푸른 빛 울창하네 초로(樵老) 어옹(漁翁)들 짝을 지어 저녁 무렵 돌아 오니 그들의 문답(問答)한 말 누가 알리요 무거운 상량(上樑)이 위로 올라가니 문성이 찬란하여 구슬처럼 이어젔네 시서의 옛 유업(遺業)을 연이어 계승하니 효우(孝友)의 어진 가풍(家風) 사람마다 우러러 보네 무거운 상량(上樑)이 아래로 내려오니 시골 땅에 내린 비와 이슬이 평야에 연이어 있네 그 무엇이 부족하여 도원(桃園)을 찾을 손가 앞날이 훤히 뚫였으니 참으로 즐겁도다 엎드려 원하노니 상량(上樑) 후 여러 신령(神靈)이 특별히 보호하여 모든 복록(福祿)이 함께 다달아 어진 자손들이 문안에 가득하고 과거(科擧) 급제(及第)가 연이어 일어나길 바랄 뿐이다. -갑술년 (1934년) 복월(復月), 음력 10월)에 양성인(陽城人) 이병수(李炳壽) 지음
瑞石西有晩歸亭山水明媚林壑?窕爲昔孝友堂張公棲遲之墟 而承武而繼起者相烈大燮安燮金整燮昌燮去年秋朴君昌煥自是亭過余極道煙霞之狀因是以結社之意與當時好詩之士有如朴璋柱李會春金炳權朴夏炯趙秉熙李奭休謨於遠近諸賢樂爲春一度遊詠之計吾是社之件是耳替之蘭亭唐之香山彷彿乎其間張氏諸賢特樹石于亭庭記其顚末未?後人知之勒之日 朴君 又過余曰 張氏諸賢 篤于 先祖以及朋友者其意遠情 又不淺請一言 以作異日故事云 서석 서쪽에 만귀정(晩歸亭)이란 정자(亭子)가 있다. 산과 물이 맑고 고우며 숲과 골짜기가 깊고 그윽한 곳으로 옛날 효우당(孝友堂) 장공(張公)이 노닐던 곳이다. 이 옛터에 정자(亭子)를 다시 일으킨 후손(後孫)이 있으니 상열(相烈) 대섭(大燮) 안섭(安燮) 정섭, 창섭 (昌燮 )등이다. 거년 가을에 박군(朴君) 창환(昌煥)이 이 정자(亭子)로부터 돌아와 나에게 주변의 아름다은 경관을 설명하면서 결사(結社)의 뜻을 비치었다. 당시 시(詩)를 좋아 하던 선비로 박장주(朴璋柱), 이회춘(李會春), 김병권(金炳權), 박하형(朴夏炯), 조병희(趙秉熙), 이석휴(李奭休) 등이 있었다. 원근의 여러 어진 선비들과 상하여 봄철에 한번씩 모아 시(詩)를 읊으며 노니는 계획을 마련하였다. 진(晋)나라의 난정(蘭亭)과 당(唐)나라의 향산(香山)에 견줄 수 있는 아름다운 광경이 이곳에 재현되었다. 이를 기쁘게 여긴 장씨(張氏) 문중의 어진 선비들이 후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특별히 기념비를 세워 이 시회(詩會)의 전말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돌을 깍아 글자를 새기려는 어느 날 박군(朴君)이 또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장씨(張氏) 문중의 여러 선비들이 이미 선조(先祖)를 위한 사업을 마친, 나머지 힘을 미루어 친우들에게 까지 이러한 혜택을 베푸려 한다. 그 의미가 심장하니 청컨대 한마디 곁들어 후일의 고사(故事)가 되도록 함이 어떠하는냐 ?’고 하였다. 내 그의 이러한 청에 의해 삼가 이글을 지은 바이다. -기묘년(1939년) 삼월 삼질 날 흥양(興陽) 송광세(宋光世) 삼가 기록함
作此亭世誰 洞荷張氏也 作此社世謠 盃盃盖燕趙古也 作亭之意何址 先祖晩歸之美也 作社之意何羨 夫主人先歸之能也 亭前後白馬伏龍 蒼結靄結遠焉而寫湖 近焉而極樂流流 涓涓三山二水之句 人可而看今也 波滔滔目前 花草摠是 吳宮庭上衣冠 聿非晋代登斯亭也 孰非謫仙之乎 歸斯亭也 松菊猶存 依然爲陶潛芝宅 惟吾徒 早晩自有同歸之日 於是乎作社云 이 정자(亭子)를 지은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누구라 하던가? 동하(洞荷)의 장씨(張氏)라 하더라 이 시(시(詩)) 모임을 만든 것을 세상에서는 무어라 하던가? 모두가 연(燕) 조(趙)의 고풍(古風)이라 하더라 이 정자(亭子)를 지은 것은 무슨 의도인가? 선조(先祖)가 느즈막하게 강호(江湖)에 돌아 감을 찬미(讚美)하기 위해서다. 시사(詩社)를 만든 것은 무었을 선망(羨望)해서인가? 무릇 주인이 먼저 강호에 돌아감을 부러워서 이다. 정자(亭子)의 앞 뒤에 백마(白馬)와 복룡(伏龍)의 자세가 서려있고 가득차있다. 멀리서는 호수(湖水)를 그려놓은 듯하고 가까이에서는 나루에 접해있어 유유히 맑게 넘쳐 흐르는 삼산(三山)과 이수(二水)가 굽어 지는 곳이다. 사람들이 모두 이제 볼 수 있으니 물결은 도도히 눈앞에 흐르고 화초(花草)는 여기에 모두 모여 있도다. 오(吳)나라 궁궐 뜰에 의관을 올리니 마침내 진(晋)나라 때 정자(亭子)에 오른 것이 아니지만 어찌 귀양온 신선(神仙)이 아니겠는가? 이 정자(亭子)에 들어 왔는데 소나무 국화가 있어서 의연히 도연명(도연명)의 집이로다 오직 우리들이 아침 저녁으로 함게 돌아갈 날이 있어서 이에 시 모임을 만든다.
鈍質癡心體不明 바탕이 둔하고 마음이 어리석어 본체가 밝지 못하니 數椽茅屋老生平 서넛너덕 서까래로 얽은 띠집에서 늙은 몸이 편안하다 一區漁笛寒江雨 한 구역에서 나는 어부의 피리 소리는 겨울 강에 비를 내리게 하고 半嶺樵歌古月晴 먼 산에서 들리는 초동의 노래 소리에 달빛은 개어 있네 性本愛山非避世 내 본성이 산을 사랑하기 때문인지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지만 力能耕野可逃名 힘껏 밭을 갈아 농사지으니 이름이 숨겨 지네 盤桓此地歸何晩 이 처럼 즐거운 이곳 어이하여 늦게 돌아 왔던고 敎子齋家是我情 아들 가르치고 집안 다스리는 것이 나의 뜻이거늘 -만귀정 주인 장안섭(張安燮)
영식재(永式齋)는 광주 광역시 서구 매월동 화개산(華盖山,속칭 개금산) 남록(南麓)에 위치해 있다. 조선 영조(英祖) 때(1750 년 경) 전북 남원(南原)으로부터 이곳 광주(光州) 세하동 동하(洞荷) 마을로 이거(移居)한 흥성장씨(興城張氏) 낙남(落南) 선조(先祖)인 효우당(孝友堂) 창우공(昌羽公, 1704년-1774) 의 제향(祭享)을 모시기 위하여 후손(後孫)들이 축조한 건물이다. 정면 4 칸 측면 2 칸인 팔작지붕으로 된 이 건물은 1929 년(己巳年)에 공정이 완료 되었다. 효우당(孝友堂) 공(公)은 성품(性品)이 총명(聰明)하고 양친(兩親)을 효도(孝道)로 극진히 보살펴 드리며 종친(宗親)과는 우애(友愛)가 돈독하였다. 어버이께서 병환에 드시자 정성을 다하였으나 마침내 상(喪)을 당하니 슬픔이 너무 커서 예절(禮節)을 갖추지 못 할 정도였으나 장례(葬禮) 절차는 철저히 의식(儀式)에 좆아 하였다. 장례(葬禮) 후 3 년간 시묘(侍墓)하였는데 하루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어 그 자리에는 풀도 자라지 못하였고, 신묘(神妙)하고 기이(奇異)하게 효성(孝誠)에 감동(感動)한 호랑이가 여막(廬幕) 주위를 호위(護衛)하였으니 실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일이 이루어졌다. 이런 까닭으로 주위에서는 칭송(稱頌)이 자자하고 지방 사림(士林)이 다투어 칭찬(稱讚)하여 공(公)의 훌륭한 행적(行蹟)이 묻혀지지 아니하고 향론(鄕論)이 계속있었으니 이 사실이 광산읍지(光山邑誌) 및 삼강록(三綱錄)에 소상이 기록되어 왔다. 전 고을이 흠모(欽慕)하는 이 일을 다만 한 집안의 본보기로만 할 것이 아니라 대대로 오래 계승(繼承)하여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니 의친왕(懿親王) 전하(殿下)께서 이 같은 행적(行蹟)을 살펴 감탄(感歎)하시고 특별히 이 사실을 권장(勸奬)하시며 재각(齋閣) 편액(扁額)을 <영식(永式)>이라 제자(題字)하시고 즉석에서 휘호(揮毫)하시었으니 비로소 마음이 바로 서야 참마음도 거기에 있고 세상(世上) 일은 반드시 이것에 기인(起因)하여 종결 된다는 것도 알았다. 더불어 말 한다면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선생께서 재각(齋閣) 상량문(上樑文)을 지으시고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선생, 안동후인(安東后人) 김서규(金瑞圭) 지사(知事)께서 기문(記文) 쓰시어 선조(先祖) 추모(追慕)함을 크게 칭송하였으니 더더욱 후손(後孫)들에게 부지런히 힘쓰라는 마음까지 밝혀 주셨으니 어찌 거듭 당부(當付)의 말씀이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지금도 <영식(永式)> 의 편액이 처마 높이 걸려 있고, 대청(大廳) 마루높이 상량문(上樑文) 기문(記文) 등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재각 앞에 <민재공(敏齋公) 퇴장(退葬) 추모비(追慕碑)>가 있다 이 비는 조선(朝鮮) 헌종(憲宗) 때에 어떤 家門에서 先山을 무단 침범해 투장하려는 것을 이에 격분한 공(公)의 증손(曾孫) 민재공(敏齋公) 봉익(鳳翼)이 단독으로 범장(犯葬)을 물리치고 선영(先塋)을 지킨 사실을 추모하면서 1950년(庚寅年)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