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遯菴) 조평(肇平), 운수자(雲水子) 두(斗) 후손으로 부(父)는 예조참판(禮曺參判) 후원(後遠), 조부(祖父)는 형조참의(刑曹叅議) 봉린(鳳麟). 증조(曾祖)는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 언기(彦琦)이며 돈암공(遯菴公) 조평(肇平)의 8 대손이다.공(公)은 1715 년(숙종 41 년) 을미(乙未)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벼슬이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다. 문정공(文正公) 도암(陶菴) 이재(李縡) 선생(先生)과 교유(交遊)하며 학문(學問)을 강론(講論)한 연유로 경기도(京畿道) 용인(龍仁)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자(字)는 성서(聖瑞), 호(號)는 민재(敏齋)이며 부(父)는 우현(木宇鉉), 조(祖)는 찬국(贊國) 증조(曾祖)은 효우당(孝友堂) 창우(昌羽)이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성행(性行)이 순후(淳厚)하고 두뇌(頭腦)가 총명(聰明)하여 6 세부터 서당(書堂)에 나가 학문(學問)을 배웠는데 어른들의 독려(督勵)를 받지 않고도 스스로 읽고 쓰고 암송(暗誦)하며 날이 갈수록 문사(文詞)가 탁월(卓越)하였다. 장성(長成)해서는 언행(言行)에 신중(愼重)하고 의리(義理)의 구별(區別)을 분명히 하니 인근(隣近)의 사람들이 우리 고을에 학덕(學德) 높은 선비가 있어 윤리(倫理) 도덕(道德)이 바르게 세워지고 좋은 풍속(風俗)이 잘 지켜진다고 자랑으로 여겼다. 몇 번의 과거(科擧)에 적중(的中)하지 못하니 탄식(歎息)하기를 내가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가난한 집에서 공부만 계속할 수 없다. 늙으신 부모(父母)가 계시는데 봉양(奉養)하지 못한 자식은 있을 수가 없다 하고 이후 과업(科業)을 포기하고 스스로 논, 밭에 나가 경작(耕作)하고 집에 오면 부모(父母)님께 혼정신성(昏定晨省)하며 지극한 효성(孝誠)을 다 했다. 아버지가 크게 아파 자리에 눞자 하늘에 자신이 대신 아프기를 기원(祈願)하고 손락을 깨어 피를 주혈(注血)하며 극진히 간호(看護)하였다. 돌아가신 후에는 여묘(廬墓)하며 슬피 호곡(號哭)하니 풀이 말라 자리지 않고 무릎 꿇은 자리가 오목 파이여 그 자국이 선명(鮮明)했다. 이에 인근 사람들이 효자(孝子)라 칭송(稱頌)하고 관부(官府)에 포상(褒賞)을 추천하였고 조정(朝廷)에서는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증(贈)하였다. 말년(末年)에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선생과 예경(禮經)과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며 교유(交遊)하였는데 이 때 화서(華西)가 민재(敏齋)란 호를 지어주며 호남(湖南)의 명사(名士)라 하며 존중(尊重)하였다. 공(公)의 나이 20세에 어떤 세도가문(勢道家門)에서 관리(官吏)를 대동(帶同)하고 효우공(孝友公) 묘(墓) 서쪽에 매장(埋葬)하려고 상여(喪輿)가 들이 닥쳤을 때 크케 놀란 문중(門中)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여 대책(對策)을 의논하였다. 이때 공(公)이 말하기를 ‘힘으로 이를 금(禁)한다는 것은 선비 된 행위가 아니니 내 홀로 나가 이를 막겠다.’하였다. 곧 의관(衣冠)을 단정(端正)히 하고 장지(葬地)에 가서 상주(喪主)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선산(先山)도 없는가? 선영(先塋)이 있다면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봐라. 너희들의 범장(犯葬)을 내가 막아야하는 이 같은 일을 행하고도 남에게 재앙(災殃)을 아니 저질렀다 할 수 있느냐? 주위(周圍)에 빈산이 많거늘 하필 우리 선산(先山)이드냐.’하면서 고성(高聲)을 지르자 산(山)도 호응했는지 숲속의 호랑이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돌먼지를 흩뿌리며 나타났다 한다. 그러자 그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이 같은 용기(勇氣)와 의기(義氣)가 발로(發露)되고 신령(神靈)의 도움을 얻어 불법적(不法的)이고 무례(無禮)한 범장(犯葬)을 퇴치(退治)하여 다른 곳으로 내 쫒고 선산(先山)을 지킨 일화(逸話)는 지금도 전(傳)해지고 있으며 민재공(敏齋公) 퇴장비(退葬碑)에 기록되어 있다.
호(號)는 하은(荷隱), 보명(譜名) 도찬(道燦), 돈암(遯菴) 조평(肇平), 효우당(孝友堂) 창우(昌羽) 후손으로 부(父)는 상원(相元), 조(祖)는 수(洙)이다. 광주(光州) 동하(洞荷) 출신으로 영식재(永式齋) 건립과 만귀정(晩歸亭) 수축(修築) 때 적극 참여하였다.
자(字)는 안섭(安燮), 보명(譜名)은 풍환(豊煥), 호(號)는 묵암(黙菴)이며 부(父)는 상욱(相勗), 조(祖)는 택현(澤賢), 증조(曾祖)는 덕규(德奎)이다. 품성(品性)이 영오(穎悟)하고 기국(器局)이 범인(凡人)을 넘어 호걸(豪傑)의 풍도(風道)를 지녔으며 행동거지(行動擧止)에 남다른 데가 있으며 국내(國內) 저명인사(著名人士)와 교유(交遊)하면서 영예(榮譽)와 재물(財物)을 멀리하고 풍류적(風流的) 생활을 즐겼고 봉선(奉先) 애족(愛族)에 진력(盡力)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24년 백리의 먼 길임을 불구하고 새로 신축(新築)된 대강(帶江) 십로사(十老祠)에 출행(出行)하여 돈암공(遯菴公) 영정(影幀) 앞에 공손히 인사드리고 부끄럽지 않은 후손(後孫)이 되기를 마음 속에 새기었다. 1929년 영식재(永式齋) 건축을 주도했으며 1934 년에는 만귀정(晩歸亭)을 증축하고 또한 1957에 흥성장씨(興城張氏) 광주ㆍ전남 종친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에는 주민(住民)들이 공(公)의 은덕(恩德)을 기리기 위해 만귀정(晩歸亭) 앞에 공(公)의 공적비(功績碑)를 세웠으며 또 연못 안에 묵암정사(黙菴精舍)를 지어 안락(安樂)하고 평온(平穩)한 노년(老年)의 휴식(休息)을 바랬다.
자(字)는 정섭(金整燮), 보명(譜名)은 흥찬(興燦), 호(號)는 백헌(柏軒)이며 부(父)는 상휴(相休), 조(祖)는 택형(澤炯), 증조는 덕규(德奎)이다. 천성(天性)이 순박(淳朴)하고 온화(溫和)하여 세속(世俗)에 물들지 않고 인정(人情)이 두터워 화목(和睦)으로 우애(友愛)하며 가난한 이를 돕고 종척(宗戚)에 경사(慶事)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물심양면(物心兩面) 지원하며 정의(正義)를 숭상(崇尙)하여 항상 바른 행실(行實)을 실천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서(才諝)가 남달리 뛰어나 독서(讀書)할 때 어려운 자의(字意)나 문구(文句)는 스스로 찾아 해석(解析)하고 주야(晝夜)로 탐구(探究)하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스승에게 물어 봐 완전히 이해(理解)가 되어야 흡족히 여기었다. 이러한 학업 매진으로 문장(文章)과 시문(詩文)이 날로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이로 입신(立身)의 도리(道理)를 알고 송화공(松窩公)의 교훈(敎訓)을 가슴 속에 새겼으며 7 세가 되자 장흥인(長興人)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고 3 년 후에는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의 가르침을 받았다. 현와(弦窩), 후석(後石), 석전(石田) 선생은 모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뛰어난 제자이며 사람들이 말하기를 남도(南道)의 큰 선비라고 불렀다. 공(公)의 학문(學問)은 매우 깊이가 있어 칭송(稱頌)할 만 하였으나 그 당시 나라가 이미 기울고 왜적(倭賊)이 침략(侵略)하여 국권(國權)을 강탈(强奪)한 때라 이 세상(世上)에 나가 경륜(經綸)을 펼 수 없는 시세(時勢)라 의기(意氣)을 잃고 귀향(歸鄕)하여 동하 마을 앞에 세워져 있는 만귀정(晩歸亭)을 중수(重修)하고 그곳에서 시가(詩歌)를 읊조리며 이 세상(世上)의 번잡(煩雜)을 잊고 자연(自然)을 즐겼다. 한편으로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보전(保全)하고 향민(鄕民)들의 교화(敎化)에 힘써 예부터 전(傳)해온 미풍양속(美風良俗)의 유지(維持)와 실천(實踐)을 권유하였다. 이는 옛 성인(聖人)인 공자(孔子) 맹자(孟子)의 행의(行誼)와 다르지 않는 선비의 자태(姿態)이며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로 서로를 공경(恭敬)하고 의리(義理)와 절조(節操)를 바로 세우는데 공(公)의 능력을 가히 알 수 있다. 이로써 공(公)의 큰 덕(德)으로 인해 더 이상 가르치지 않아도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더 배워야 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부모(父母)를 봉양(奉養)함에 살아 계실 때에는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효도(孝道)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마음과 몸을 다해 예절(禮節)을 실천함에 충실(充實)하였다. 향당(鄕黨)에서 관대(寬大)하고 후덕(厚德)한 행동을 추앙(推仰)하고 붕우(朋友)에게 오랫동안 존경(尊敬)받고 문중(門中)의 일에는 솔선수범(率先垂範)하니 모든 이가 사표(師表)로 삼으니 이 어찌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것인가. 1929년 영식재(永式齋) 건축을 주도했으며 1934년 만귀정(晩歸亭)을 증축(增築)하고 1954년에는 흥성장씨(興城張氏) 대동보(大同譜) 수찬(修纂)에도 참여하였다.
자(字)는 재범(在凡), 호(號)는 청사(晴簑)이며, 부(父)는 정섭(金整燮), 조(祖)는 상휴(相休), 증조(曾祖)는 택형(澤炯)이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관후(寬厚)하고 실천력(實踐力)이 뛰어났다. 부모(父母) 섬김에 효성(孝誠)을 다하였고 위선(爲先)함에 정성(精誠)을 쏟았으며 화목(和睦)과 우애(友愛)로 가정(家庭)을 이끌었다. 1942년 왜정(倭政) 때, 일본(日本) 경찰(警察) 고위간부(高位幹部)의 아들이 그들의 세력을 믿고 촌민(村民)을 함부로 구타(毆打)하고 전통적인 우리의 예의(禮義)와 풍속(風俗)을 무시한 채 횡행(橫行)하자 크게 분개(憤慨)한 공(公)은 동민(洞民)이 보는 앞에서 강력한 응징(膺懲)을 하였다, 이로 인해 대구(大邱) 재판소(裁判所)에서 반역(叛逆)의 죄명(罪名)으로 1년의 옥고(獄苦)를 당하였다. 해방 후는 정계(政界)에 입문(入門)하여 1972년 광산(光山) 통일주체국민회의(統一主體國民會議) 초대 위원장(委員長)을 지내면서 지역사회(地域社會)의 발전을 위한 노력과 군민(郡民)의 여론(輿論)을 수렴(收斂)하고 군정(郡政) 시책 결정에 큰 역할(役割)을 하였다. 또한 1974년부터 98년 까지 광주(光州)ㆍ전남(全南) 종친회(宗親會) 회장(會長)에 취임(就任)하여 장씨(張氏)의 위상을 높이기고 종원(宗員) 간의 화합 단결을 위해 헌신(獻身)하였으며 종회(宗會)의 지속적인 발전을 모색하였다. 1975년 정계(政界)에서 물러난 공(公)은 씨족(氏族)에 대하여 깊은 애정(愛情)을 가지고 대ㆍ소종회(大ㆍ小宗會)에 적극적으로 참여(參與)하였는데 특히 돈암공파(遯菴公派) 족보(族譜)를 편찬할 때, 전북(全北) 정읍(井邑) 소성면(所聲面) 중광리(中光里)의 노현(弩鉉), 옥현(玉鉉), 고창(高敞) 성내면(星內面) 신림리(新林里) 죽동(竹洞)의 연풍(然豐), 남원(南原) 대강(帶江)의 수현(修鉉)과 함께 상부상조(相扶相助)하고 심혈(心血)를 쏟아 1976년 정확(正確)하고 정밀(精密)한 보첩(譜牒)을 출간(出刊)하는 데 일익(一翼)을 담당하였다. 1982년에는 본향(本鄕)인 고창(高敞) 성내면(星內面) 조동리(槽洞里)에 있는 충숙공(忠肅公) 연우(延祐) 묘역(墓域)을 대대적으로 정화(淨化)하는 사업이 전개되었다. 이때 종원(宗員)들의 여망(輿望)에 따라 남도(南道)을 대표(代表)하는 부유사(副有司)로 추대(推戴)되어 동분서주(東奔西走) 자금(資金) 확보에 매진(邁進)하고 단아(端雅)하고 장엄(莊嚴)한 묘소(墓所)로 탈바꿈하는데 큰 힘을 보태었다. 이어 1988 년 흥덕(興德) 대종회(大宗會) 회장(會長)에 선출(選出)되어 충숙공(忠肅公) 사우(祠宇)인 충절사(忠節祠) 건립을 위한 흥성(興城) 장씨(張氏) 대동보(大同譜) 수보(修譜)를 추진하고 족보편찬위원회(族譜編纂委員會) 고문(顧問)으로서 역량(力量)과 성심(誠心)을 다해 막중한 임무를 완수하고 족보(族譜)를 반포(頒布)할 수 있었다. 1990년에는 돈암공파종회(遯菴公派宗會)를 창립하였다. 지금까지 돈암공(遯菴公) 후손들은 수백년 동안 정읍(井邑) 고창(高敞) 남원(南原), 무안(務安), 나주(羅州), 광주(光州), 담양(潭陽), 장성(長城) 등 각지로 분산(分散)되어 살아 왔기 때문에 전체적인 회합(會合)을 갖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그러나 산업 사회가 발달하면서 교통수단과 통신 문화의 발달로 인해 상호 연락이 용이(容易)하게 되었고 회합(會合)도 가능한 일이 되었다, 더군다나 족보(族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직접 상면(相面)하는 일이 빈번(頻繁)했으므로 이런 호기(好期)를 놓치지 않고 시의(時宜)에 맞게 돈암공파종회(遯菴公派宗會)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이때 공(公)과 합심(合心)하고 협조(協助)한 분들은 정읍(井邑) 광동(光照)의 강하(康河), 철하(哲河), 남원 대강의 수현(修鉉), 장성 필암의 하규(河奎)와 진석(鎭石), 담양의 원(元), 고창 심원의 익균(益均), 무안 청계의 규만(奎萬) 등이다. 이후 종회(宗會)는 날로 창성(昌盛)하고 알차게 발전하여 다른 종파(宗派)에서 부러워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 공(公)이 기초를 다진 공로(功勞)라 할 수 있다. 1995년 세상(世上)을 떠나니 씨족(氏族)의 큰 기둥이 이제 볼 수 없다고 모두가 애석(哀惜)히 여기였다. 마지막 운명(殞命)을 거둘 때에도 아들들을 불러 모아‘내가 종중(宗中)에 큰 빚을 지고 간다. 너희들이 형편(形便)이 좋아 지면 꼭 내 대신 종중(宗中)의 은혜(恩惠)에 보답해주기 바란다’라는 유언(遺言)를 남겼다. 효심(孝心)이 지극한 아들들은 선고(先考)의 말을 잊지 않고 수년(數年) 후에 각 종중(宗中)에 적절한 보답(報答)를 실천(實踐)하였으니 동하(洞荷) 본문중(本門中)에 거액 희사, 충절사(忠節祠) 묘정비(廟庭碑) 제막식 때 기념품(紀念品) 전달. 십로사(十老祠) 입구(入口)에는 거대한 표지석(標識石)을 만들어 세웠다.
자(字)는 민섭(敏燮), 호(號)는 인묵재(忍黙齋). 돈암(遯菴) 조평(肇平), 효우당(孝友堂) 창우(倡優)의 후손으로 부(父)는 상훈(相勳)이며 광주 동하(洞荷) 출생이다. 정훈(庭訓)을 이어받아 효우(孝友)가 돈독(敦篤)하고 친족(親族)과 화합(和合)하며 숭조(崇祖) 봉선(奉先)에 정성(精誠)이 넘쳤다.
호(號)는 송원(松原)이며, 부(父)는 정섭(金整燮), 조(祖)는 상휴(相休), 증조(曾祖)는 택형(澤炯)이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엄격(嚴格) 강직(剛直)하고 매사(每事)에 세밀(細密)하였으며 효성(孝誠)을 다해 부모(父母) 섬기고 종척(宗戚)에 깊은 애정(愛情)과 관심(關心)이 많을 뿐만 아니라 화목(和睦)과 우애(友愛)로 종문(宗門)을 이끄니 종원(宗員)들이 경복(敬服)하였다. 1941 년에 광주지방(光州地方) 법원(法院) 검사국 고원(雇員)으로 관계(官界)에 인연을 맺은 후 1980년 정년(停年) 퇴임할 때까지 36 년간을 전남(全南) 전북(全北) 지방의 각급(各級) 검찰관서(檢察官署)에서 검찰(檢察) 행정(行政) 업무에 종사하면서 법질서(法秩序) 확립과 사회(社會) 정의(正義) 실현에 일익(一翼)을 다한 공(公)는 꾸준히 면학(勉學)에 힘쓰고 자아(自我) 발전에 부단(不斷)한 노력을 기울려 1945 년에는 고등전형(高等銓衡) 시험을 합격하는 등 입지(立志)의 인사(人士)로 국민(國民) 법률(法律) 구조 활동으로 법생활(法生活) 안정과 권익 보호에 기여하고 생활(生活) 법률(法律) 상담(相談) 또는 계몽(啓蒙)으로 사회의 법질서(法秩序) 확립에 공헌(貢獻)한 법무행정(法務行政) 분야의 원로(元老)이다. 1948 년 광주지방검찰청(光州地方檢察廳) 서기(書記)로 봉직한 이래 1953 년 검찰(檢察) 서기관(書記官) 을급(乙級), 1972 년에 검찰(檢察) 서기관(書記官) 갑급(甲級), 광주지검(光州支檢) 장흥지청(長興支廳) 서기과장(書記課長) 및 동지청(同支廳) 검사(檢事) 직무대리(職務代理), 광주지검(光州支檢) 집행과장(執行課長) 전주지검(全州支檢) 군산지청(群山支廳) 사무과장(事務課長), 광주지검(光州支檢) 목포지청(木浦支廳) 서기과장(書記課長) 등을 차례로 역임(歷任)하였고 1980 년 정년(停年) 퇴임 한 후 법무(法務) 사무실을 개업하여 운영하다가 1999 년 1월 3일 별세(別世)하였다. 재임(在任) 중 형사소추(刑事訴追), 공판진행(公判進行) 형집행(刑執行) 등 행정(行政) 업무의 가속화(加速化)와 능률화(能率化)에 노력하여 국민(國民)의 인격(人格) 보호에 진력(盡力)하였으며 법치주의(法治主義) 구현에 지대(至大)한 업적(業績)을 쌓았고 친절(親切)과 공정(公正), 봉사(奉仕) 정신으로 업무(業務)를 수행하여 칭송(稱頌)을 받았다. 일찍이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 치하(治下)의 억압된 시절(時節)에 40만 여 평(坪)의 향리(鄕里) 소재(所在) 천수답(天水畓)을 전천후(全天候) 농사(農事)를 위한 수리답(水利畓)으로 만들기 위해 4 년간의 각고(刻苦) 끝에 완수(完遂)한 후에 단계(段階) 양수장(揚水場) 설치, 수로(水路) 관개(灌漑) 공사 등 농촌(農村) 근대화(近代化)에 주도적(主導的)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평생(平生)을 근면(勤勉) 강직(剛直) 청렴(淸廉)을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아 모범적인 공직(公職) 생활을 함으로써 자기 분수(分數)에 만족(滿足)하며 안빈(安貧) 낙도(樂道)의 진실된 생활(生活)을 영위(營爲)하였다. 또한 종회(宗會) 활동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초창기(草創期) 종회(宗會)가 재정(財政) 기반이 미약(微弱)하여 모든 사무(事務)와 문서(文書) 제작, 통신(通信) 연락이 원활(圓滑)하지 못한 안타까운 실정(實情)을 통찰(洞察)하고 스스로 나서 자신의 재력(財力)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고 무고(誣告)한 종인(宗人)들이 억울함을 호소(呼訴)할 때는 법질서(法秩序) 안에서 해결(解決)해 주어 지금까지 그 선행(善行)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간 녹조(綠條) 소성훈장(素星勳章), 면려포장(勉勵襃章), 국리총리(國務總理) 표창장(表彰狀)을 받았으며 광주(光州) 지방검찰청(地方檢察廳) 검찰(檢察) 동우회장(同友會長) 및 전남(全南) 검찰(檢察) 동우회장(同友會長)으로 회원(會員)들의 화합(和合) 단결(團結)에도 기여했다.
자(字)는 재풍(在豊), 호(號)는 유현(幼玄)이며 광복(光復) 전후에 송정(松汀) 읍장(邑長)을 지냈던 묵암(黙菴) 안섭(安燮)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 별세(別世)한 백부(伯父) 승환(升煥)의 양자(養子)로 입적(入籍)하고 신학문(新學問)을 수학(修學)하고자 일본(日本)의 건너 가 동경 식산대학(殖産大學) 법학과(法學科)를 수료하고 귀국(歸國) 후에 광주지검 검사국, 전남도 학무국(學務局) 등에서 공직(公職) 생활을 하면서 성실과 근면이 현저하여 1960년 대통령 표창장(表彰狀)을 받았으며 동아일보(東亞日報) 신춘문예(新春文藝)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문인(文人) 활동을 시작하였다. 광주신보사(光州新報社) 및 잡지사 논설위원(論說委員) 역임하였고, 장편소설 <눈보라의 계절>을 신문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1962년 재건국민운동 본부장 공로표창장을 비롯하여 광산군민의 상(賞), 광주서구 구민(區民) 상(賞), 근정포장(勤政襃章) 등을 수상(受賞)하였다. 현재까지 한국세정신문(韓國稅政新聞) 논설위원(論說委員)으로 활동하고, 평론집(評論集)과 무쟁삼매(無諍三昧), 유구무언(有口無言). 단편소설집 등 다수 저서(著書)가 있다.
호(號)는 동암(洞菴), 돈암 조평(肇平), 효우당(孝友堂) 창우(昌羽) 후손으로 부(父)는 상한(相韓), 조(祖)는 택춘(澤春)이며 광주(光州) 동하(洞荷) 출생이다. 장기간 공직(公職)에 있으면서 성실(誠實)과 친절(親切)로 주민(住民)들에게 봉사(奉仕)하였으며 퇴임(退任) 후에는 종사(宗事)에 전력(專力)하여 효우공(孝友公) 문중(門中)의 제반사(諸般事)를 처리하였고 감찰공종회 회장(會長), 전남종친회 이사(理事), 흥덕대종회 이사(理事)를 역임하였다.
호(號)는 현송(峴松). 돈암(遯菴) 조평(肇平), 운수자(雲水子) 두(斗), 효우당(孝友堂) 창우(昌羽) 후손으로 생부(生父)는 민환(敏煥), 부(父)는 해섭(海燮), 조(祖)는 상훈(相勳)이다. 천성(天性)이 온순(溫純) 침착(沈着)하고 매사(每事)에 세밀(細密)하였다. 오랬동안 고등학교(高等學校)에서 교사(敎師)를 지내고 정년 후에는 문중(門中) 일에 매진(邁進)하여 복잡(複雜)하고 난해(難解)한 종중사(宗中事)를 해결하였고 효우당(孝友堂) 문중의 재산(財産) 관리와 새로운 임산(林山)을 구입하는데 공헌했다. 또 대종회관 (大宗會館) 건립할 성금(誠金)을 모아 이식(利殖)을 통해 자산(資産)을 늘려 건물(建物) 매입(買入)에 큰 보템을 주었다, 현재 대종회(大宗會) 수석(首席) 부회장(副會長)을 맡아 대소(大小) 업무(業務)를 수행하고 있다.
호(號)는 습청(習聽), 돈암(遯菴) 조평(肇平), 효우당(孝友堂) 창우(倡優)의 후손으로 부(父)는 재만(在萬), 조(祖)는 정섭(金整燮)이다. 정훈(庭訓)을 이어 받아 선조(先祖) 봉향(奉香)과 친족(親族) 화합(和合)에 진력(盡力)하고 돈암공종회(遯菴公宗會), 감찰공종회(監察公宗會), 흥덕대종회(興德大宗會)에 참여하여 이사(理事)와 부회장(副會長)을 역임하였다.
호(號)는 하정(荷汀). 돈암(遯菴) 조평(肇平), 운수자(雲水子) 두(斗), 효우당(孝友堂) 창우(昌羽) 후손으로 부(父)는 기섭(箕燮), 조(祖)는 상교(相敎)이다. 천성(天性)이 명쾌(明快)하고 매사(每事)에 적극적(積極的), 긍정적(肯定的)이다. 일찍이 문중(門中)의 신뢰(信賴)와 기대(期待)가 높아 종회(宗會) 업무(業務)를 맡게 되었고 항상 열정(熱情)과 애정(愛情)을 가지고 매사(每事)에 진력(盡力)하였다. 효우당(孝友堂) 문중(門中)의 총무(總務)로 있을 때에는 영식재(永式齋)의 대대적인 수리(修理)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전남종친회, 감찰공종회 총무(總務)가 되어서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원만한 각종 행사(行事)가 성공할 수 있도록 이끌어 냈다. 또 흥성장씨(興城張氏) 청년회(靑年會) 홍보부장이 되어 씨족(氏族)의 위상(位相) 고양(高揚)과 회원(會員) 간의 단합(團合)과 친화(親和)에 노력하고 있다. 사진(寫眞) 예술(藝術)에 능란(能爛)하여 모든 행사(行事) 때에는 이를 촬영(撮影)하고 생생한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